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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고 있던 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실수로라도 맞닿는다면 떨어지지 않고 붙은 자리부터 썩게 만들어 갈 듯 질척이고 끈적거리는 기분이다. 오른쪽 눈을 찌푸리며 옆에 펼쳐 놓은 상대의 편지를 다시 한번 훑었다. 죽음에 대한 결의가 확고한 편지를 노려본다고 해서 적어 내리는 편지가 마무리 지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중화될까 봐서. 사실은 알고 있다. 제 얼굴을 본다고 해서 눈이 멀고 돌이 되지 않는다는 걸. 급조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적어 보낼 수밖에 없을 만큼 마주한 채 내밀 거절이 두려웠다. 당신이 원하는 바와 같이 진실로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싶다. 우연한 기회로 시선을 도둑질하고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닌 지나가다 마주쳐 바람이 차다는 안부 인사를 건네다 사랑에 빠진 것이었으면 싶다.

이 감정이 진정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이토록 음습한 속내도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다면, 그리하야 곁에 머물도록 할 수 있다면 나는 그리 하겠다. 책상 서랍을 열어 동봉할 양피지를 꺼내고서 입을 맞췄다. 이것은 나의 마지막 구애이자 덫이니 부디 당신이 받아들여 주기를.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다시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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